[Happy 할아버지의 푸념] 다시 배우는 한국사
늙으막에 역사책을 뒤지면서 한숨이 나온다. 발음만 갖고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고유명사들, 인명, 지명, 관직명, 정책명들이 난무해서 이해 하기가 쉽지 않다. 한문을 어느 정도 아는 우리 할아버지 세대도 이 모양인데 한글 전용 세대는 오죽할까 걱정이 된다. 안중근 의사를 외과의사냐 내과의사냐 물어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한문을 모르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 말은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 잘 산다고 대답하는 것과 다름 없다. 지금까지 남들 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야 자기들이 잘 사는지 못 사는지 알게 아닌가 말이다. 신문을 보니 한국의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다. 고등학교에서나 겨우 선택 과목으로 명맥이 유지된다니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지 의심스럽다. 한국이 거대한 아시아 대륙의 한 구석에 토끼 같은 모양으로 붙어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대륙의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었다. 숱하게 외부로부터 침략도 받았다. 1555년 을묘왜란, 1627년 정묘호란, 1636 병자호란은 그중 대표적 외환(外患)이다. 역사책에 1254년 몽고군이 고려 백성 20만명을 잡아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당시에 인구가 얼마였는데 20만명이나 잡아갔다는 말인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1800년말 개화기 한국 인구가 1500 만었다는데 13세기 인구는 더 적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당시 잡혀간 사람들은 아녀자를 제외한 장정들일 테니 그 시대 쳐녀들은 시집도 못 갔을 것 같다. 1394년엔 명나라에 말 1만필, 그리고 다시 1449년 명나리에 말 23만필을 보냈다고 한다. 또 1432년엔 소 1만 마리를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이 소 1000 마리를 끌고 이북에 간 것도 대단한데 조선시대에 말 23만필, 소 1만 마리라니 정말 상상이 안 간다. 소는 그렇다 치고 말은 왜 그리 필요 했을까. 여진족과 왜구들의 행패 또한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이 삼년이 멀다 하고 쳐들어와 양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왜구의 소행을 보자면 소말리아의 해적은 양반이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잠복해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배를 습격, 나포한 뒤 몸값을 받고 인질을 풀어주지만 왜구는 떼를 지어 우리 나라를 침략했다. 양민을 학살하고 물건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등 그 행패가 엄청 심했다. 남쪽 해안에만 간혹 나타났다면 참을만 하지만 예성강, 옹진, 내포, 선주, 백천, 순천, 장흥, 안변, 성주, 심지어는 서울까지 쳐들어 왔다. 때로는 해적선 50척이 떼지어 쳐들어온 적도 있다. 이 정도면 해적질이 아니라 완전 선전 포고다. 아니나 다를까 급기야 임진왜란이 터졌다. 물론 조선도 앉아서 당하지 만은 않았다. 서너 차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로 쳐들어가 본떼를 보여줬다. 하지만 그냥 말 그대로 혼만 내주고 돌아 왔다. 때로는 왜구를 달랜다고 쌀도 보내줬다. 차라리 그때 아주 왜구의 뿌리를 뽑고 대마도에 눌러 앉았다면 대마도도 우리 나라 영토가 됐을 텐데 말이다. 우리 역사를 보면 외환을 겪지 않은 평화로운 시절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역대 왕중 가장 불쌍한 사람은 고종 같다. 재위기간 43년 동안 중국, 일본, 영국, 불란서, 독일, 스페인, 미국 등 외세에 시달렸고 집안 내부적으로는 대원군과 민비간 갈등으로 단 하루도 발 뻗고 편히 잔 날이 없었을 듯 싶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뒤 해방은 됐으나 우리의 불행한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지정학적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둘로 잘렸고 북한 주민들의 참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한민족 반만년 역사상 북한주민들처럼 불쌍한 사람들은 없었던 것 같다. 젊은 사람들도 이같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주머니에 돈 좀 생겼다고 허황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민족의 백년대계를 생각해야 한다.